길을 걷다 우연히 만나는 연예인이 그렇게 큰 행운은 아니고, 멀리서도 휘적휘적 걸어오는 큰 키의 모델이 놀랍지 않으며, 비싼 차들과 애플 스토어가 점령한 이곳! 신사. ‘신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급 진 분위기에 그에 걸맞는 비싼 밥값! 신사의 중심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고 있어 매일 점심을 사 먹어야 하는 운명인 나. 비싼 것만이 전부가 아닌, 신사에서는 이런 점심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겠노라! 야심차게 선보이는 토련 크루의 신사동 맛쟁이.신사의 뻔한 가성비맛집, 신사 존맛탱 리뷰에 질렸다면 지금 당장 스크롤을 내려보자. 우리 회사는 신사동고개라는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애매한 교통편덕에 매일 아침 원치 않는 조깅을 하며 고개를 오른다. 그렇게 많은 칼로리를 소모한 출근을 하고 자리에 앉으면, 그때부터 고민을 한다. "오늘 점심 뭐 먹지? " 이 고민을 항상 함께 나누며 전투적으로 맛집을 찾아주던 입사동기가 떠나고, 나의 점심은 꽤나 지루해졌다. 딱히 가리는 게 없는 우리 팀원들은 대체로 가까운 곳을 선호하는데, 그냥 가까운 곳 가시죠! 라는 말을 때마다 어떻게 점심을 가까운 곳으로 정할 수 있지? 하는 월드킷 크루다운 생각과 함께 그러시죠~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날 발견한다. 그러고선 꼭 후회한다. 때문에, 업무에 파묻힌 내가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점심시간의 점심메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일이다. 출근길에 대충 찍은 벚꽃 확실하게 따듯하지는 않고 저녁엔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부는 요즈음. 스포츠 리그도 중단되고, 이것저것 단절되어가는 일상에서 얄궂게도 벚꽃은 제 때에 맞게 예쁘게도 피었다. 출근을 하며 잠깐 마주친 벚꽃을 보고 일본이 떠올라서, (이 시국에?) 오늘 점심은 일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아는 이유로 가로수길 거리는 한산한데, 신사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원래’ 조용한 식당이 있다. 여기가~ 형훈라멘!쉿-! 국내에 몇 없는 쇼유라멘 전문점 형훈라멘이다. 형훈라멘은 옆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식사를 즐겨주길 바란다는 문구가 테이블마다 놓여있다. ‘맛집’의 덕목이라 함은, 단연 맛이 1순위 이겠지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넘친다 넘쳐 갬성시대에서는 맛 이외의 많고 다양한 요소들이 맛집을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테리어,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그 음식점만의 브랜딩. 형훈라멘은 맛, 인테리어, 브랜딩. 이 세가지를 모두 가졌다. 형훈라멘의 정갈한 인테리어 안타깝게도 형훈라멘은 우리 회사와 조금 거리가 있고,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혼자 형훈라멘으로 향했다. 혼밥은 아무렇지 않던 나였는데, 혼자와서 메뉴 두 개를 시킨 나를 본 점원은 두 분이냐고 물었고, 당당하게 아뇨. 라고 말했다. 혼자라고 하니 바 자리로 안내해주셨는데, 바로 앞에 직원분들이 계신 주방이라 혼자 먹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수저가 놓인 냅킨에서도 큼지막하게 박힌 로고에서도 느껴진다.서론이 길었는데 그래서 뭐가 맛있느냐하면, 형훈라멘은 라멘뿐만 아니라 호르몬동도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호르몬동은 대창덮밥인데, 과거에는 라지 사이즈도 있었다. 2인일때는 1인1덮밥과 쇼유라멘을 추천한다. 영롱한 노른자호르몬은 일본어로 소의 내장을 뜻한다. 호르몬동!(13,900원) 기름이 많은 대창이 올라간 덮밥이라. 이름만 들어서는 조금 느끼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 느끼한 걱정을 잡아주기 양파, 와사비, 락교, 파튀김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와사비를 빼고 싶다면 메뉴에서 와사비가 없는 호르몬동을 고르면된다.) 계란 노른자와 밥, 대창을 절대 한꺼번에 비비지 않고 노른자만 터트려 밥 한 숟갈에 대창과 와사비, 파튀김을 같이 얹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먹으면 흐음~ 소리가 절로 나온다. 대창의 양념 소스는 비법이라 알 수 없지만, 정말 잘 숙성된 깊은 맛의 간장 베이스 소스가 대창에 듬뿍 베여있고, 마냥 짜지만은 않은 이 맛이 조금은 달달하면서 마지막은 계란의 고소함으로 끝난다. 대창은 쫀득했고 비린 맛은 전혀 나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 시냇물처럼 맑은 국물쇼유라멘(9,500원)의 ‘쇼유’는 간장이란 뜻인데, 형훈라멘은 고유의 타레간장으로 맛을 내었다고 한다. 닭과 조개로 육수를 내어 일본 본토 라멘의 염도보다 낮게 만들어 짠 맛을 강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태 먹어봤던 라멘보다 짠 맛은 확실히 덜하다. 기존의 일본 라멘이 가지지 못했던 조금 시원하고 깔끔한 맛의 쇼유라멘. 버섯 같은 부드러운 닭 살코기와 파를 조금 얹어서 면과 함께 호로록 하면, 대창 덮밥의 진한 맛을 닭육수의 라멘 국물이 깔끔함으로 채운다. 식사를 할 때 국물을 같이 먹는 걸 좋아하는 나는 대창덮밥과 쇼유라멘의 조합이 넘모 좋았다.오픈 시간에 맞춰 가지 않으면 호르몬동을 맛보기 어려운데, 시국이 시국인지라 조금 늦게 가더라도 충분히 호르몬동을 맛볼 수 있다. 손님 수가 적어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기가 많은 형훈라멘. 나 같은 혼밥러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조용히 식사를 즐기기엔 충분한 곳이다. 이 날 메뉴 두 개를 혼자 다 먹으려니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한 시간이라는 짧은 점심시간에, 잠시나마 조용한 거리에 있는 라멘집에 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보지도 않은 일본에 데려다 주는 형훈라멘 덕에 여행이 가고 싶은 요즘, 좋은 대리만족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나의 점심시간, 형훈라멘에서의 혼밥은 어떨까?